$$ \large\textsf{\textbf{김정호는 감옥에서 죽었는가}}\\ \scriptsize\textsf{대동여지도와 김정호에 얽힌 이야기} $$

일제 때 일본은 우리 나라의 뿌리를 완전히 없애려 하였다. 그 상징 작업의 하나로 우리 나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경복궁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만들었다. 이 건물은 위에서 보면 日자형이다. 그리고 서울 시청 건물은 위에서 보면 本이라는 글자 모양을 하고 있다.

풍수지리상 경복궁은 백두산에서 지기(地氣)가 뻗어 내려오는 한반도 제 1의 명당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런데 일본은 조산인 북한산에서 경복궁에 이르는 지맥을 끊는다고 큰 바위산에 쇠말뚝을 많이 박아 놓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배타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나쁜 일을 숱하게 하였다.

대한 제국을 자기들 식민지로 강탈하는 과정에서 고종 황제의 옥새를 위조한 것이 그 중의 하나인데, 이런 중요한 사건이 이제서야 밝혀질 정도라면 일본이 우리 역사의 진실을 감추는 데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고, 또 얼마나 뻔뻔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사관에 입각해 우리 나라 역사를 왜곡하였는데, 그것은 한민족은 열등하므로 일본의 지배를 받아야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는 식민지 통치에 불리한 우리 나라의 자료를 많이 없앴다. 이런 배경하에서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한 것들이 날조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꾸며 낸 이러한 거짓을 사실로 알고 있다.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러한 거짓은 지금까지 계속 국민 학교 교과서에 실려 왔으며, 텔레비전 방송의 어린이 프로그램에도 방영되고 있는 실정이다.

꾸며진 이야기 중의 하나는 김정호가 감옥에 갇혀 죽었다는 것이다. 1993년 교육부 발행 국민 학교 오 학년 이 학기 국어 읽기 교과서는 '김정호'라는 단원을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억울한 죄명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 때, 나라를 다스리던 완고한 사람들이 그 지도를 보고, 나라의 사정을 남에게 알려 주는 것이라고 오해를 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김정호의 피땀이 어린 지도의 판목까지 압수하여 불사르고 말았으니, 정말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 당시 우리 나라는 외국과 거의 왕래를 하지 않았고,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기를 꺼리고 있었던 것이다. 김정호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업적은 오늘날까지 찬란하게 빛나며, 우리의 가슴속에 살아 있다. 아울러, 그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신념은 우리에게 영원한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호의 옥사 기록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옥사설이 틀렸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이 몰수당하거나 압수당한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종 실록', '승정원 일기', '추국안' 등 당시 사료들을 꼼꼼히 보아도 그런 흔적은 나오지 않는다.

둘째, 국가 기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어 그를 감옥에 가두고 대동여지도의 판목을 압수하여 모두 소각했다고 하였는데, 현재 대동여지도 판목 한 장이 숭실대학교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931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전시한 고도서전관 목록에 판목 두 장이 들어 있으며, 그 밖에도 출품을 거절한 일본인이 대동여지도 판목 수십 장을 비장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또, 고산자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최성환 후손들도 대동여지도의 판목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화재로 없어졌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대동여지도의 판목은 압수당하지도 않았고 불태워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셋째, 고산자 김정호가 죄인이었다면 그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발행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유재건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싣지 못했을 것이다.

넷째, 고산자와 가까웠던 최한기, 최성환, 그리고 비변사에 있는 국가 기밀 지도를 제공해 준 신헌 장군 등이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이라도 받았어야 할 텐데, 그러한 기록이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신헌은 오히려 대원군 시절에 병조 판서, 공조 판서의 높은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김정호가 죄인이라면 신헌이 그의 문집 속에 김정호가 자기와 협력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을 남길 수 없었을 것이다.

김정호의 옥사설이 공식적으로 처음 나온 것은 일제가 1934년에 발행한 '조선어 독본(朝鮮語讀本)'이다. 이 책의 '김정호전'에는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의 지배자들이 어리석고 나라 발전에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다음은 '김정호전'의 끝 부분이다.

'그러나 대원군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외국을 싫어하는 마음이 큰 어른인지라 이것을 보고 크게 노하사 "함부로 이런 것을 만들어서 나라의 비밀이 다른 나라에 누설되면 큰일이 아니냐?" 하시고, 그 판목을 압수하시는 동시에 곧 정호 부녀를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부녀는 그 후 얼만 아니 가서 옥중의 고생을 견디지 못하였는지 통한을 품은 채 사라지고 말았다. 아아, 비통한지고! 때를 만나지 못한 정호……. 그 신고와 공로의 큼에 반하여 생전의 보수가 그같이도 참혹할 것인가? 비록 그러하나 옥이 어찌 영영 진흙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랴. 명치 37년(1904년)에 일로 전쟁이 시작되자 대동여지도는 우리 군사(일본군)에게 지대한 공헌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총독부에서 토지 조사 사업체 착수할 때에도 둘도 없는 좋은 자료로 그 상세하고도 정확함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탄하게 하였다. 아, 정호의 고난은 비로소 이에 혁혁한 빛을 나타내었다. 하리로다.'

이처럼 '김정호전'에는 김정호의 공로를 우리 정부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감옥에 가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뿐만 아니라 대동여지도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도 사실과 다르게 쓰고 있다. 즉, 조선 총독부와 대한 민국 정부가 만든 두 교과서 모두 김정호가 지도를 만들게 된 계기로 우리 나라에서 만든 지도가 형편없었던 것을 들고 있다.

예전의 우리 지도에 대해 총독부 발행 교과서에는 '이같이 틀림이 많아서야 해만 되지 이로움은 없는'것으로, 대한 민국 교과서에는 '엉터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한 개인이 답사하고 실제 측량한 성과물 한 가지로만 그렇게 자세하고 정확한 지도책 규모(이백 쪽이 넘는다)의 방대한 대동여지도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가 답사를 하였겠으나 기존의 우리 나라에서 제직된 수준 높은 많은 지도를 참고했기 때문에 뛰어난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베레스트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이유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히말라야 산맥에 있기 때문이다. 평야 가운데서 또는 낮은 산 가운데서 혼자 그렇게 높이 우뚝 솟기 힘들다. 이것을 생각할 때 대동여지도가 뛰어난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그 이전의 우리 나라 지도 수준을 엉터리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친우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이들 여러 지도의 도법을 서로 비교해서 청구도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