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족사적(氏族史的)으로 본 그의 신분 -
김정현 글
씨족사적 시각이란 것은 고산자 김정호가 갖고 있는 본관이나 성씨로 보는 것을 말함이다. 그가 분명 청도김씨였다면 그를 두고 미천한 집안의 사람이니 또는 천민이니 하는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천민이란 말은 조선시대 사회계급에서 발생했던 말로 백정(白丁), 종을 두고 일컬었다. 그들에게는 성(姓)을 갖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성을 갖고 있어도 본관(本貫)을 두지 않았다. 단지 김가(金哥)면 김가, 이가(李哥)면 이가라고 할 뿐 어데 김씨니, 어데 이씨니는 말하지 못했다. 본관을 말하면 시조가 누군지를 알아야 하고 뿌리에 대한 어느 정도 아는바 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들 천민은 그들의 성을 가졌던 최초의 조상을 모르고 하여서 본관까지 얘기는 못하는 것이다.
만약 본관까지 말한다면 가짜 성씨란 것이 들통나서 곤욕을 당하는 일이 생기고 한다. 이유는 본관을 둔 성씨는 대개 양반 계급이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성씨는 성 그 자체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본관에다 무게를 둔다. 같은 글자의 성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친족 또는 혈족이라 하지 않는 것이 한국인이다. 그것은 고려시대부터 본관제도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전통적으로 내려왔던 혈족표시였던 것이다.
만약 어느 천민이 XX이씨라 말한다면 그 천민이 말하는 본관의 진짜 이씨 사람이 알면 가만 두지 않는다. 우리 성씨 문중에 그런 천민이 없다고 하는 데서 야단을 치는 것이다. 가짜 양반이라 관아(官衙)에 고발하여 형도 받게 한다.
당시는 양반 상놈 신분 차별이 심하여 그것을 증명하는 것에는 주로 족보가지고 따지는 것으로 했다.
조선시대 숭조사상(崇祖思想)은 곧 본관과 성씨를 중요시하는 것으로 했다. 그것은 곧 조상을 알게 하는 것이라 하여 반드시 본관과 함께 자기 성을 말하는 것이 관습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본관을 두지 못 하는 천민에게는 그같은 숭조사상은 둘 수가 없기도 하였다.
한미하다는 말도 천민이란 말과 다를 바가 없다. 신분이 보잘 것 없는 비천(卑賤)한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을 두고 한미하다고 우리는 곧잘 말한다.
고산자 검정호에 대해 〈본관은 청도, 황해도 봉산 출생, 어릴 때 서울로 이주,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학문을 열심히 닦았으며...〉하는 글이 있는 것을 보는데 여기에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란 말은 바로 천민의 뜻이었다고 봐야한다. 과연 그가 천민 출신이었을까?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만들고 난 후에 유명인으로 등장하였다. 그것도 조선시대가 끝나갈 무렵이다. 그가 자서전(自敍傳)이라도 남겨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어릴적부터 있어 온 일이거나 집안관계 얘기는 알 수 없다. 비단 고산자 김정호 뿐만 아니라 당시 큰 벼슬을 한 사람도 제대로 자기 행적을 기록하여 놓지 않아서 백년이고 이백년이고 지나서 후세에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실상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이다.
후세에서 그 사람이 손수 적어 놓은 행적기록이 아니더라도 동료나 가까운 후손대에서 기록해 놓은 것이 있으면 수 백년 세월이 흘러도 신상을 파악할 수는 있다. 오늘날 한국인의 각 성씨 문중에 많은 족보가 있다. 족보는 시조로부터 자기 대에 이르기까지 혈족계통을 작성해 놓은 것이다. 여기에 조상의 행적들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출생과 사망, 벼슬, 부인, 묘소 등의 기록이다.
그들 족보를 보면 시조로부터 선대 조상들의 계보가 일목요연하게 작성되어 있어도 실전(失傳)이란 말을 써서 생몰연대(生沒年代), 배(配), 묘(墓)를 표기하지 못한 것이 많다. 이름만 적어놓고 하였다. 이 것을 보고 이름은 어떻게 알고 표기해 놓았는가 하는 말도 있다.
족보에 대한 지식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는 사람은 족보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는 일이 많다. 우리나라의 각 성씨의 문중족보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면 족보에 담겨져 있는 것이 사실적이라고 믿지 않는다.
거의가 조선중기 이후에 비로소 족보란 것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조선조 숙종(1674~1720)때부터 였다. 그 많은 성씨들 중에 안동권씨(安東權氏)와 문화유씨(文化柳氏)만이 그들보다 앞서 성종(1469~1494)때와 중종(1506~1544)때 있었던 것 뿐이다.
한국의 많은 성씨들 시조는 대개 신라와 고려 때 있은 사람으로 되어 있다. 족보에 보면 그 시조로부터 내려가면서 하나하나 빠짐없이 계보가 작성되어 있다. 그리고 행적도 표기해 놓았다. 그렇다면 시조로부터 계속 후손들 행장(行狀)이 있어 왔다는 얘기 가 되는 것이다. 사실 그들 성씨문중에서 대대로 빼 놓지 않는 기록을 해왔을까? 무슨 근거로 몇 백년 전에 있는 조상을 하나하나 찾아 계보작성을 하였는가 하는 말이 나온다. 단편적으로 있는 자료들을 모아 시대에 따라 우리 조상인지 확인하여 작성하고 했던 것이다. 단편적이라는 것은 같은 본관과 성씨의 사람들이 나름대로 기록해 둔 가첩(家牒) 같은 것을 갖고 확인들하고 엮고 한 것을 말한다. 더러는 옛 비문을 보고 조상계보를 찾기도 하여 족보자료로 삼고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조상계보가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족보에는 과장이 많다. 사실 그런 벼슬을 하였는지 의심되는 것이 많은 것이다. 예로, 신라 어느 왕 때 있은 조상이라 하면서 그 조상의 벼슬 표기에 신라왕조에는 없던 벼슬을 이를테면 고려 때 있은 벼슬 이름을 적어 놓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족보에 근거를 두는 것은 객관성이 없다 할 수 있다. 참고는 해 볼 수 있어도 그대로 옮겨 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성씨문중인이라도 족보에 다 실려 있지는 않다.
고산자 김정호가 청도김씨 족보에 이름이 없다고 하여 뿌리 없는 천민으로 말하는 학자가 있었다. 차라리 본관을 모르는 고산자 김정호라고 했으면 청도 김씨와 무관하다고 여겨 그의 신분이 어떻든 청도김씨 종중 측은 아무 이견제기를 하지 않게 된다. 고산자가 천민이라면 청도김씨도 그와 같이 비천한 성씨가 되어서 그같은 이의제기를 하기 마련인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는 분명 청도김씨 사람이다. 그의 글에서 오산(鰲山)은 청도(淸道)의 옛 지명이다. 특히 청도김씨 시조가 오산군(鰲山君)이다. 고려 고종 때 받은 봉호(封號)이다. 특히 황해도 봉산은 청도김씨 집성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