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와 대동여지도에 대한 몇 가지 궁금증
아래에는 고산자 김정호와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이나 잘못 알려진 사실에 대해 하나씩 살펴봅니다. 여러 가지 견해를 종합하는데 많은 분들의 서술이 참고가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최종적인 정리가 되면 그 목록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세가지 사항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네 번째 항목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어떻게 해서 현재의 지도와 그렇게 유사한 지도가 될 수 있었는 지를 풀어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 AnGang.
1. 김정호는 감옥에서 죽었을까 ?
고산자의 옥사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러나 <청구도>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등이 몰수나 압수당한 일이 없으며 이병도는 옥사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실제로 「고종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면밀히 검토해 보아도 그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그 증거로는 첫째, 고산자가 만든 지도나 「지리지」가 현재까지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둘째, <대동여지도>판목이 현재 숭실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고산자의 후원자였던 최성환 후손들도 <대동여지도>판목을 다수 소장하고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동여지도>의 판목은 압수 당하지도 소각되지도 않았다. 셋째, 죄인이라면 유재건이 「이향견문록」에 그를 수록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의 중인(中人)들의 활동사항을 기록한 「이향견문록」 권말에 고산자전이 추가되었으며 그 시기는 고산자가 죽을 무렵이었다. 넷째, 고산자와 교유했던 최한기나 최성환, 신헌 등이 고산자와 연루되어 어떠한 처벌을 받았어야 할 터인데 그런 기록이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신헌은 오히려 대원군 때 중용되었다. 위와 같은 자료들을 고찰해 보면 일제가 1934년에 발행한 「조선어 독본」에서 비롯된 ‘고산자의 옥사설’은 대원군을 우매한 정치 지도자로 몰기 위해 날조한 허구다. 이에 따라 최근 개편된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이런 내용이 삭제되었다.
2. 김정호는 어떻게 옛 자료를 접할 수 있었을까 ?
고산자의 신분은 평민이거나 그와 비슷한 지위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전의 역사, 지지, 지도 등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지지 편찬이나 지도 제작에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말년에 지은 <대동지지>의 인용서목에는 한국 사서 43종, 중국 사서 22종 등 모두 65종의 사료가 수록되어 있으며, <청구도>와 <여도비지>에 인용된 것까지 하면 총 67종 자료들이 인용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이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을까 ?
이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그의 삶과 주변 환경을 고려해서 추측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이들 (위의 인용서목) 사서 중 민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최한기의 후원으로 구독할 수 있었을 것이며, 국가의 기밀 사항에 해당하는 사서, 자료, 지도 등의 열람에는 최성환과 신헌의 적극적인 뒷받침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사람은 김정호와 대동여지도를 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들과 고산자와의 관계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김정호는 과연 백두산에 올랐을까 ?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백두산을 7회나 등정하였으며 전국을 3차례나 두루 답사했다고 곧잘 얘기된다. 이런 얘기는 고산자의 위대성을 드높이고 「대동여지도」의 정밀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오늘날에도 백두산을 혼자 등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그리고 그가 백두산을 등정했다면 <대동지지>에 수록되어 있는 백두산조 기사를 그렇게 소략하게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정호에 대한 사실을 전해주는 대표적인 사료를 한 번 보자.
①김정호는 재주가 많아 그림도 잘 그리고 조각도 잘 했는데 특히 지리학에 깊이 빠져 지도와 지리지를 깊이 고찰하고 널리 수집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다(유재건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중 김정호전). ②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지도와 지리지를 수집하여 여러 지도의 도법을 상호비교해서 ‘청구도’를 만들었다. (최한기의 ‘청구도’ 제문) ③나는 우리나라 지도제작에 뜻이 있어 비변사나 규장각에 비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에 좀먹다 남은 자료들을 널리 수집하고 이를 상호 비교하여 또 지리서를 참고하여 합쳐서 하나의 지도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 일을 김백원(김정호)에게 위촉하여 완성하였다(申櫶의 ‘대동방여도’서문).
위의 예문은 유재건, 최한기, 신헌이 김정호에 대해 쓴 기록들이며 이 세 사람들은 김정호와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인물들이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고산자가 전국을 두루 답사했다고 지적하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기존 지도들을 두루 모아 좋은 점을 따서 집대성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의심 나는 곳은 직접 답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이와 같이 고산자는 전국을 두루 답사한 것이 아니라 삼국시대 이래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고지도를 참고하여 여러 지도를 만든 것이다. 실제로 국보 248호인 ‘조선방역도’등 대동여지도보다 앞서 만들어진 고지도가 규장각이나 대학박물관에 5백여 종이 넘게 소장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김정호는 답사가 보다는 위대한 지도 편집자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