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義洌(황의열), 1990, 大東輿地圖의 讀圖, 匡祐堂(광우당), pp 13-16)
(大東輿地圖 地圖類說 국역)
황의열(黃義洌 : 성균관대학교·강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風后(풍후)㉠가 地圖(지도)를 받아서 九州(구주)㉡를 비로소 布陳(포진)하였으니 이것이 地圖의 始初(시초)요, 山(산)과 바다에 대한 책이 있어 13篇(편)이 되니㉢ 이것이 地理書(지리서)의 始初이다. 周禮(주례)㉣에 大司徒(대사도)㉤이하 職方(직방)㉥과 司書(사서)㉦와 司險(사험)㉧의 관리들이 모두 地圖를 가지고 險하고 막힌 것을 두루 알고 각 地方(지방)의 이름난 물건들을 分辨(분변)하여 바로 한다고 하였으며, 전국시대의 蘇秦(소진)㉨·甘茂(감무)㉩의 무리들은 모두 지도에 依據(의거)하여서 天下(천하)의 험하고 평탄한 것을 말하였다.
簫何(소하)㉪가 關門(관문)㉫에 들어가서 먼저 地圖와 書籍(서적)을 거두었으며, 鄧禹(등우)㉬와 馬援(마원)㉭은 또한 이로써 光武帝(광무제)㉮를 섬기고 功名(공명)을 이루었다. 儒學者(유학자)로는 鄭玄(정현)㉯·孔安國(공안국)㉰에서부터 그 아래로 모두 지도와 서적을 얻어 보아서 周나라와 漢(한)나라의 山川을 징험하였으니, 대개 지도로써 그 形象(형상)을 살피고 지리서로써 그 數(수)를 밝히었으며, 왼편에 지도를 두고 오른편에 서적을 두었으니 참다운 학자의 일이다."고 하였다.
晉(진)나라 裵秀(배수)㉱의 지도 만드는 理論(이론)《制地圖論(제지도론)》을 간추리면 대략 이러하다. "圖書를 만드는 것은 그 由來(유래)가 오래 되었다. 옛날에 하늘이 形象을 드러내고 制度(제도)를 세운 때부터 그 活用(활용)을 힘입었고 三代(삼대)㉲에는 그 官職(관직)을 두어 史(사)㉳가 그 직책을 관장하였다." 또 "지도를 만드는 바탕이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分率(분율)이니 그것으로 廣輪(광륜)(原注(원주) ; 周禮에 이르기를 東西(동서)를 廣이라 하고 南北(남북)을 輪이라 한다)의 척도를 밝히는 것이다.둘째는 準望(준망)이니 그것으로 여기와 저기의 體制(체제)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셋째는 道里(도리)이니 그것으로 다니는 곳의 里數(이수)를 定(정)하는 것이다. 넷째는 高下(고하)이고 다섯째는 方邪(방사)요 여섯째는 迂直(우직)이다.
이 여섯 가지로 각각 地形(지형)을 因(인)하여 形態(형태)를 만드는 것은 그것으로 평탄함과 험저함을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도 모양만 있고 分率이 없으면 멀고 가까운 차이를 살필 도리가 없고, 分率은 있으되 準望이 없으면 한 모퉁이에서는 잘 되더라도 다른 곳에서는 반드시 실패하게 된다.
또 비록 準望이 있어도 道里가 없으면 산과 바다로 끊어지고 막힌 지역에 있어서는 능히 서로 통할 수가 없고, 道里가 있으나 高下·方邪·迂直과 대조함이 없으면 길의 里數가 반드시 遠近(원근)의 실제와 서로 어긋나게 되고, 準望의 바른 것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여섯 가지를 참작하여 考察(고찰)한 연후에 원근의 실제가 分率에 의해 정해지고 彼此(피차)의 실제가 道里에 의해서 정해지고 度數(도수)의 실제가 高下·方邪·迂直의 計算(계산)에 의해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높은 산과 큰 바다로 막혀 있고, 단절된 지역이나 다른 지방이 멀리 있으며 오르고 내리고 어긋나고 굽은 것이 제각기 생겼다 하더라도 모두 가히 들어서 바로 할 수 있는 것은 準望의 法(법)이 이미 정해져 있고 曲直·遠近과 더불어 그 형태를 숨긴 것이 없기 때문이다."
宋(송)나라 呂祖謙(여조겸)㉵이 쓴 〈漢輿地圖(한여지도)〉의 序文(서문)에 이르기를 "輿地의 地圖가 있은 것은 옛날부터이다. 成周(성주) 때부터 大司徒가 天下 土地의 지도를 관장하여 그로써 廣輪의 數를 두루 알았고, 職方氏의 지도는 후에 더욱 상세하여졌다. 漢나라가 秦나라를 멸망시키기에 이르러서 簫何가 먼저 그 圖書를 거두어서 비로소 天下의 험하고 막힌 것과 戶口(호구)의 많고 적음의 차이를 모두 알았으니 그런즉 오래된 것이다."고 하였다.
《方輿紀要(방여기요)》㉶에 이르기를 "方位(방위)를 바로 하고 里道(이도)를 밝히는 것의 두 가지는 方輿의 要體(요체)인데 더러는 그것을 소홀히 한다. 일찍이 이르되 '東쪽'이라고 하면 東南쪽이나 東北쪽이나 모두 東쪽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자세하게 구한다면 方位는 똑같으나 里道가 들쑥날쑥한 것이고 里數가 같아도 山川이 구불구불할 것이다. 그러면 지도에 그려놓은 것이 의지할 만한 것이지만 꼭 의지할 수 없고, 적어놓은 것이 믿을만한 것이지만 꼭 믿을 수가 없다. 오직 그 지형을 환히 아는 사람만이 비로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方位와 里道를 모두 버린다면 담벼락에 얼굴을 대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하였다.
이름난 산과 갈려 나온 산은 큰 근본이다. 그 사이에 우뚝하게 솟은 것도 있고 나란히 솟은 것도 있고 연이어 솟아 있거나 중첩하여 솟아 있는 것도 있다.
큰 내와 갈려 나온 흐름은 물의 큰 근원이다. 그 사이에 돌아 흐르는 것도 있고 나뉘어 흐르는 것도 있고 합쳐서 흐르거나 끊어져 흐르는 것이 있다.
《方輿紀要》에 이르기를 " 孫子(손자)㉷가 이렇게 말했다. "산고 숲의 험하고 막힌 것과 늪과 못의 형세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行軍(행군)을 할 수가 없으며, 鄕導(향도)㉸를 쓰지 아니하는 사람은 地勢(지세)의 이로움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내 글을 얻지 못하면 또한 가히 향도를 쓸 수가 없으니 향도를 가히 믿을 수 있겠는가. 어째서인가, 향도는 임시로 쓰는 것이고 地勢의 이로움은 평소에 알아두는 것이다. 평소에 일찍이 九州의 形勢와 사방의 험하고 평탄한 것에 대해서 하나하나 그 큰 벼리를 판별하고 그 곁가지를 알아두지 아니하고서 임시의 향도에게서 믿음을 취하고자 하면 어떻게 적이 어리석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要塞(요새)가 되는 곳을 分辨하고, 느리고 급한 기미를 살피면, 기습공격하는 것과 정면 공격하는 것이 가슴 속에서 결정되고, 죽고 사는 것이 손바닥 위에서 변하게 되니, 地勢의 이로움이 있는 곳을 因하여 臨機應變(임기응변)하는 것이다. 또한 行軍의 一端(일단)만이 아니라 天子(천자)가 안으로 萬國(만국)을 慰撫(위무)하고 밖으로 사방의 오랑캐에 臨하는 데 있어서 가지와 줄기, 강한 것과 약한 것의 구분과, 가장자리와 중심자리, 중요한 것과 가벼운 것의 형세를 몰라서는 아니 된다.
宰相(재상)이 天子를 도와서 나라를 다스리는데 무릇 변방 요새의 유리하고 불리한 곳과, 전쟁에 대한 마땅함들을 모두 몰라서는 안되는 것이다. 모든 官員(관원)과 여러 府署(부서)에서 天子를 위하여 백성과 사물을 모두어 다스리는데 있어서는 財物(재물)과 稅金(세금)이 나오는 곳과 전쟁과 나랏일의 바탕을 모두 알아야 한다. 監司(감사)와 守令(수령)들은 天子가 백성과 社稷(사직)을 맡긴 것을 받았으면 그 지역에 뒤섞여 있는 것과 산과 못의 우거지고 숨겨진 것, 그리고 농사짓고 누에치고, 샘물을 쓰는데 유리한 것과 백성들의 實情(실정), 風俗(풍속)이 다스려지는 것을 모두 알아야 한다.
四民(사민)㉹이 여행하고 왕래하는데 무릇 水路(수로)나 陸路(육로)의 險하고 평탄하고에 따라 나아가고 피하는 내용들을 모두 몰라서는 아니 된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이를 말미암아서 쳐들어오는 적을 막는 일을 돕고 强暴(강폭)한 무리들을 제거하며, 시절이 평화로우면 이로써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니 모두 내 글을 따라서 취하는 것이 있을 따름이다." 고 하였다.
《文獻備考(문헌비고)》에 이렇게 일러 있다. " 세 바다의 沿邊(연변)과 두 江(강)의 沿邊이 모두 10,930里이다. 세 바다의 연변이 무릇 128邑(읍)에 총 8,043里이다. 두 강의 연변이 총 2,887리이다. (原注 : 변방의 고을 사이의 거리로 계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