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 조선 후기의 실학자(實學者) 겸 지리학자. 淸道金氏 봉산파(鳳山派). 일명 정호(正浩).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백지(伯之), 호는 고산자(古山子).
당대의 실학자(實學者) 최한기(崔漢綺)와 친교가 깊었고, 《대동여지도》의 재간(再刊)과 《대동지지》의 간행연도가 모두 1864년(고종 1)인 것으로 보아 1800년경에서 1864년경까지 살았으며, 순조·헌종·철종대에 걸친 사람으로 추정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하며, 서울에 와서는 남대문 밖 만리재〔萬里峴〕에 살았다고도 하고, 공덕리(孔德里)에 살았다고도 한다. 불우한 생활 속에서 오직 지도제작과 지지편찬(地志編纂)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버지의 지도 판각을 도왔다고 한다.
불과 120여년 전의 일이면서도 그의 생애와 후손에 대해 이토록 알려진 바가 없는 것은 사대부집안이 아닌데다, 당시까지만 해도 실학에 대한 인식, 특히 지도제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미약했던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나 추측된다.
특히, 개인의 지도제작은 천기를 누설한다 하여 당시로서는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조선조의 지도와 지지를 집대성한 학자이며,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만든 지도에서 좌표(座標)에 의거하여 구분한 대축척지도첩을 발달시켰다.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 里鄕見聞錄》에는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여지학(輿地學), 즉 지리학에 열중하여 널리 제가(諸家)의 도지(圖志)를 비교 연구하여 1834년(순조 34)에 《청구선표도 靑邱線表圖》(일명 靑邱圖)책을 만들었고, 이어서 《지구도 地球圖》를 만들었으며, 《대동여지도》를 손수 판각하여 세상에 인포(印布)하였고, 《동국여지고 東國輿地攷》, 즉 《대동지지》를 편집하였다고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안에 있는 〈만국경위지구도변증론 萬國經緯地球圖辨證論〉에 의하면 위의 《지구도》는 최한기가 중국 장정병(莊廷)의 《지구도》 탑본(榻本)을 1834년에 판각하였는데 그것을 새긴 사람은 김정호라고 기록하였다.
김정호는 《지구도》를 판각한 1834년에《청구도》상하 2책을 만들었으며, 이어서 1861년(철종 12)에는 혼자의 힘으로 《대동여지도》 22첩을 판각하여 간행하였다. 《청구도》는 필사본이고, 《대동여지도》는 22첩으로 된 목판본이다.
《대동여지도》는 약 16만2천분의 1 축척으로 남북은 22단(1段은 120리)으로 나누고, 다시 각 단을 6치 6푼의 폭(1幅은 80리)으로 하여 횡절(橫折)하도록 하여 이합(離合)이 자유로운 절첩식(折疊式) 지도로서 10리마다 눈금을 찍어 거리측정이 용이하도록 하였으며, 당시로서는 가장 정확한 지도였다.
내용은 산과 산맥, 하천의 이름과 형상, 그리고 관청·병영·성터·역참(驛站)·창고·목장·봉수(烽燧)·능묘·방리(坊里)·고현(古縣)·도로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는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이를 기초로 하여 자신이 제작한《청구도》를 참고자료로 이용하여 이 지도를 제작하였으며, 《동국지지》와도 관련이 깊다.
《대동여지도》는 서양 지도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동양의 전통적인 도법을 이어받아 집대성한 것인데, 위치의 설정에 있어서 중강진(中江鎭) 부근이 북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고, 울릉도가 남쪽으로 내려온 것을 제외하면 오늘날의 지도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청구도》는 남북 100리, 동서 70리를 1판으로 하였고, 《대동여지도》는 남북 120리, 동서 80리를 1판으로 하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에 비하면 산세와 하계망(河系網)이 훨씬 더 자세하고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전국을 한장의 지도로 만들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는 다시 약 90만분의 1 소축척전도인 《대동여지전도》를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항간에 전하는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30여년간 전국 각지를 두루 답사하면서 실측에 의해 만들었으며, 이를 위해 백두산만도 17여회나 올라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교통사정과 김정호 개인의 재정적인 형편으로 볼 때 전국을 모두 답사했을 것으로는 믿기 어렵고, 그때까지의 지도를 기초로 하여 보충,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지도에서 볼 수 없는 지형표시법의 개발, 상세한 하계망의 기입 등은 물론, 행정구역 대신에 좌표에 의하여 일정한 규격으로 지표를 구분한 점 등은 당시의 지도학에서 한걸음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