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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유튜브 동영상

$\footnotesize\textsf{■ 방송일시 : 2003년 2월 8일 (토) 20:00-21:00}\\\footnotesize\textsf{ ~~~~~~~~~~~~~~~~~~~~~~KBS 1TV}$ $\footnotesize\textsf{■ 담당PD : 박현민 [781-3557] / 작가 : 정윤정}$ $\footnotesize\textsf{■ 더빙대본}$


[프롤로그] 땅을 알고자 하는 마음은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살고있는 공간에 대한 애정에서 시작한다. 140여년전. 국토의 깊고 얕은 곳까지 속속들이 알고자 했던 한 사내의 꿈! 그것은 한 장의 지도로 남겨졌다.


[VCR 1]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대동여지도는 모두 10여본. 그 중에서도 성신여대 소장본이 보물 850호로 지정돼 있다. 상태가 가장 양호할 뿐 아니라, 지도 일부에 색을 칠한 것이 조화를 이뤄서, 예술적 가치도 높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철종 12년인 1861년. 지금으로부터 140여년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지도는 우리가 흔히 봐오던 한 장짜리 지도들과는 달리 책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20센티미터의 종이를 옆으로 길게 이어 붙여 놓았는데, 이같은 책이 스물 두권이 모여서 하나의 지도를 이루게 된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려놓은 전국지도인데, 만약 이것을 한 장으로 만들었다면 그 크기가 워낙 커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다. 때문에 떼어 놓으면 분리도가 되지만 합하면 전도가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어느 정돌까? 진본과 똑같이 만든 영인본을 가지고 확인해보기로 했다. 바닥에 펼쳐진 지도책이 절반을 넘어서면서 한반도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제주도에서 백두산까지- 스물 두권의 지도책을 모두 붙이자 엄청난 크기의 전국 지도가 완성되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이 거대한 지도속에는 과연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산맥이다. 산봉우리를 각각 떼어서 그리지 않고 줄기와 줄기를 이어서 마치 하나의 구조물처럼 표현하고 있다. 땅을 살아있는 사람의 몸과 동일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국토관이 반영된 결과다. 산맥은 국토의 골격을 형성하는 뼈대이며,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강물은 혈맥이라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백둑대간의 개념이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인데, 백두산에서 시작된 국토의 큰 흐름이 남북을 관통해 마치 척추처럼 한반도를 지탱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동여지도 속에 나타난 산봉우리는 모두 삼천여개. 전체를 하나로 표현하면서도 각가의 산들이 가지고 있는 개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백두산은 실제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게 그렸다. '백두'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려는 듯 흰 봉우리를 강조하고 있다. 함경북도 명주군에 위치한 칠보산- 마치 보석을 박아놓은 듯이 보인다. 금강산은 무수한 봉우리를 표현해, 일만이천봉의 이미지를 살리고 있다. 다섯 개의 봉우리를 의도적으로 과장한 오대산. 서울의 삼각산 역시 세 개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공주 계룡산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것 같은 모습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인식속에 살아있는 산의 이미지를 지도속에 옮겨놓은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도로에 대한 표현이다. 모든 도로가 마치 고속도로를 연상시키듯 직선으로 그어져 있는데 이것은 실제와는 크게 차이가 있다. 이처럼 사실과 달리 도로를 왜곡해서 표현한 까닭은 물길과의 구별을 위해서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은 곡선으로 나타냄으로써 한가지 색깔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목판지도의 단점을 보완하려 한 것이다. 이전의 지도들과 대동여지도를 구별지어주는 가장 큰 특징은 기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모두 스물 두 개가 기호를 만들었는데, 오늘날은 모든 지도에서 당연하게 사용되는 것들이지만 우리나라 지도의 역사에서는 대동여지도가 최초였다. 구체적인 활용의 예를 살펴보면, 영아를 표시하는 이 기호는 병영 등의 군영, 읍치는 오늘날의 시청이나 군청을 나타낸다. 이외에도 군사기지를 나타내는 진보다 역참, 봉수 등 다양한 기호가 사용됐는데, 이전과 달리 글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임으로써 지면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양보경 교수 인터뷰)

140여년전에 만들어졌음에도 현대 지도 못지 않은 아이디어가 활용된 지도- 대동여지도는 크기뿐 아니라 내용면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도였다.


[VCR 2] 예나 지금이나 지도를 가장 많이 활용하게 되는 경우는 길을 찾을 때다. 고지도를 연구하는 이상태 선생과 함께 대동여지도의 도로망을 확인해보았다. 직선으로 표현된 도로들은 지도상에서는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산길이거나 구불구불하게 돌아가는 길이라 훨씬 더 멀 수도 있다. 도로의 길이만 가지고는 실제 거리를 가늠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대동여지도에는 이같은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다. 도로 위 10리마다 점을 하나씩 찍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방점들은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산악지역의 경우엔 주로 조밀하게 나타나는데 가장 좁은 곳은 1.5센티미터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넓은 곳은 얼마나 될까? 2.5센티미터- 주로 평야지대에서 확인된 수치다.

(이상태 선생님 인터뷰)

방점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두 지점간의 거리를 파악하는데만 머물지 않는다. 전국 어느 지점에서나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의 거리와 일정을 예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전국을 연결하는 교통 네트워크를 가능케 한다. 이것은 모든 도로망이 서울만을 중심으로 표기되던 이전 지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획기적인 변화다.

(현장음)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지도들에선 이전보다는 발전된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다. 이 지도는 옆에 따로 표를 만들어서 가로와 세로가 만나는 자리에 두 지점간의 거리를 표시해 두었다. 이 표를 활용할 경우 거리는 알 수 있지만 여전히 경로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동여지도의 도로 표기 방법이 왜 탁월한 것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